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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 | 232 | == 끝없는 식량 징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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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3 | >'먹을 게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게 둬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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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4 | >不够吃会饿死人,最好饿死一半、让另一半人能吃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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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6 | >려우 즈카이, 1959년 2월, 띠에우리엔 금강반점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수확량의 3분의 1까지 징발할 것을 지시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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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8 | >'“청평 인민은 본래 초식주의자들이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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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0 | >1960년 루이나 기자 에드거 스노우와의 인터뷰에서 려우 즈카이가 한 발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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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 | >'''식량은 흔히 무기로 악용되었다.''' 굶주림은 구타보다도 먼저 동원되는 처벌 수단이었다. 남령성의 여러 생산대대를 면밀히 살펴본 조사관들은, 굶어 죽은 사람의 80%는 처벌로서 식량을 받지 못해 죽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공동식당에서 식량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종종 공식적 배급량보다도 적은 양을 받았다. 한 농민이 설명했듯이 "솥에서 죽을 푸는 국자는 사람들 얼굴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많은 인터뷰 대상자들이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현상, 즉 공동식당에서 음식을 퍼주는 사람이 "반동분자"라고 간주된 이들을 고의적으로 차별하던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훌륭한 노동자들에게 퍼줄 때는 국자가 솥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간 반면, "반동분자"들에게 퍼줄 때는 국자가 표면을 살짝 떠낼 뿐이라 묽은 죽 물만을 받았다. 농민은 계속 회고했다. "그 물 같은 죽은 푸르스름했고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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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4 | >청평 대기근: 인민의 참극 1958~1962, 프랑크 디쾨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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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6 | >"농민은 엄격한 절약을 실천해야 한다. 최대한 검소하게 살고 하루에 두 끼만 먹어라. 그 중 한 끼는 부드럽고 액체여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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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8 | >1959년 말 청평 인민일보에 실린 새로 집단화된 농업 노동자 대중을 위한 식단 지침 [* 루이나 기자 재스퍼 베커(Jasper Becker, 1956~)가 1997년 출판한 '려우의 비밀스러운 기근(Ryou’s Secret Famine)'의 서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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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 | 당시 청평은 북산을 견제하기 위해 사비에트로부터 소총부터 MiG-15와 같은 최신식 무기까지 대량으로 사들이고, 이후 MiG-17에 대한 라이센스권을 구매하는 등, 사비에트제 무기를 적극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탄도 미사일 기술과 핵무기 기술을 이전해준다는 조건으로, 1956년 <청사합작>이라는 이름으로 사비에트와 거액의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당시 청평은 외화가 부족했고, 사비에트에 대가로 지불할 만한 것은 식량밖에 없었다. 마침 사비에트도 식량자급을 못해 상당량의 곡물을 외국에서 수입하던 처지였던지라, 청평이 식량으로 이를 갚는다는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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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 | 그런데 려우 즈카이가 대놓고 "핵전쟁이 일어나도 청평 인민은 살아서 새 지구를 건설할 것이며, '''핵폭발도 우주적으론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서방과 핵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사비에트 당국은 려우 즈카이에 대해 큰 경계심을 갖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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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4 | 사비에트 서기장 인터루쇼프는 려우 즈카이에게 핵무기의 무서움에 대해서 여러차례 설명하고 루이나 해군과 함대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 군사 기지 건설 등을 제안했으나, 인터루쇼프를 나약한 인물로밖에 보지 않았던 려우 즈카이는 그를 크게 비웃었고, 수영할 줄 모르는 인터루쇼프를 일부러 수영장에 집어넣어 망신주는 등 모욕을 주었다. 분노한 인터루쇼프는 결국 청평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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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6 | 이런 청사관계의 악화는 가속화되었다. 1959년 인터루쇼프는 1956년에 맺은 청사합작을 파기하고 사비에트인 기술 고문들을 모조리 데려가버렸다. 이 때문에 청사 사이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이 벌어졌고, 청평은 독자적으로 핵무기와 유도탄을 개발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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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8 |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는 청평 지도부가 벌인 여러 삽질과 자연재해가 합쳐지면서 곡물 생산량이 반감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청평은 차마 사비에트에게 "상환 좀 늦춰주면 안 되겠나?"고 말하지 못했다. 려우 즈카이 특유의 자존심 때문도 있었고, 자국의 기아가 들통나는 것도 경계했기 때문이다. 체제 경쟁 중에 자국의 기아 소식이 알려진다면 사비에트에게 체면이 안 서므로, 결국 청평은 어떻게든 곡물 수출을 계속해야 했다. 려우 즈카이는 이를 위해 전국의 수확량의 3분의 1을 징발하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런 려우 즈카이에게는 연일 각지에서 "수천만 명의 인민이 굶어 죽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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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0 | >'''"먹을 것이 없으면 끼니를 줄이면 되잖나! 굶어 죽는 건 옛날에도 있었던 일인데,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보고까지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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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2 | 심지어 '''"청평 인민은 초식동물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육류 수출에도 박차를 가했다. 물론 많은 양의 외화가 청평으로 유입되었기는 했지만 그 외화가 기근 해소를 위해 투입되지는 않았으며 결국 수천만 명의 인민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우리는 풍년이 들었다!"'''는 허세를 부리며 무기 대금 + 기술 제휴비로 사비에트에 수많은 농축산물을 상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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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4 | 결국 이러한 행태로 청평 상당수 지역에서 식량이 바닥을 보였으며, 인민들은 과거 황조시대 때 벌어졌던 기근처럼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는데 급급했다. 또한 그마저도 없으면 굶주림 속에서 얼어 죽어갔다. 또한 때로는 살인을 해서 그 고기를 먹거나 굶어죽어 널부러진 시신들을 먹는 사건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이런 려우 즈카이의 행보를 두고 일부 논자들은 대약진운동을 가리켜 '''학살'''로 분류하기도 한다. 려우 즈카이가 기근 보고를 받고도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식량징발을 늘리는 식으로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 유사 사례로 아일랜드 대기근, 우크라이나 대기근, 북산의 고난의 행군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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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6 |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사망자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단순 아사자뿐만 아니라, 늙고 병들어 일을 못하거나 너무 배가 고파 음식을 훔친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을 반동으로 몰아, 지역 공산당 간부들과 민병대원들이 닥치는대로 죽여댔다. 이렇게 맞아죽고, 총살당하고, 생매장되고, 삶아져서 비료로 쓰인 사람들의 숫자만 수백만에 이르렀다. 청평 정부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루이나, 플로렌시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곡물 수입을 승인한다. 1961년에만 400만톤을 수입해야 했다. 1959년에 청평이 세계 각국에 팔아치운 곡물의 양이 400만톤이 넘는다. 그리고 공동급식소 등의 황당무계한 정책들을 일부 폐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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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8 |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청평 공산당 지도부는 외국과의 계약을 철저히 준수하고, 국제적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곡물 수출을 늘리기로 결정했고, 1960년에는 수출 제일 정책이 채택될 정도였다. 우방국들에 대한 해외 원조를 늘리기로 해서 알바니아 같은 나라들에도 무상으로 곡물을 보냈다. 이 괴리가 얼마나 심했는지, 당시 청평에서 활동한 알바니아 외교관 푸포 쉬티는 이후 "청평 인민들은 우리에게 모든 걸 내주었다. 뭐든 필요하면 부탁만 하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웠다."라고 회상했을 정도다. 원조를 받는 쪽에서조차 "이거 받아도 괜찮은 걸까?"라며 의구심과 괴리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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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0 | 또한 징발된 곡물의 우선순위는 수도 띠에우리엔과 대도시, 중공업의 심장부였던 북부 공업지대에 주어졌고, 농촌 주민들의 필요는 철저히 뒷전으로 밀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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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2 | 려우 즈카이의 총리였던 저우언라이는 갈수록 더 많은 곡물을 징발하도록 밀어붙였다. 그는 농촌에서 충분한 곡물을 공출하여 도시를 먹이고 외화를 벌어야 할 책임을 진 인물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직접 만나거나 전보를 통해 지방 간부들을 닦달했다. 그는 청평 내부의 이해관계에서 농촌의 필요는 항상 양보되어야 한다는 위계질서를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엄청난 양의 곡물이 남령성에서 끔찍한 기근을 낳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끝내 주저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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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4 | 결국 려우 즈카이는 현실을 몰랐기에 대약진운동이 인민을 잘살게 할 거라고 굳게 믿었지만, 저우언라이는 인민이 망하게 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총리 자리를 지키려고 인민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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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6 | '''다른 이들도 "인민의 아사는 국가의 요구보다 덜 중요하다"는 시각을 완고하게 고수했다.''' 덩사오핑은 "계획경제 하에서는 징발이 마치 전시 때처럼 가차 없이 강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기근의 참상이 지도부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던 1961년 말 연설에서, 그는 수백만 명이 아사했던 화운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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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8 | >과거에 일부 지역들에서는 징발이 너무 과중했고, 예를 들어 화운은 올해를 비롯해 몇 년 동안 징발이 심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나는 화운의 방식을 지지한다. 그들은 결코 고초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며, 우리 모두는 화운에서 배워야 한다. 내가 화운 출신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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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0 | 이후 려우 즈카이는 한때 자신이 즐겨 만났던 루이나 기자 에드거 스노우에게 "청평을 발전시키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해 상대를 경악하게 했다. "15년 안에 루이나와 플로렌시아를 초월하겠다"고 장담하던 그는 나중에 "100년이 걸려도 서방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회의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심지어 천윈 같은 원로 간부들은 "위대한 인민공화국보다, 반동과 제국주의자가 장악한 황조 시절이 더 먹고 살기 좋았다"고 자조할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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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2 | 하지만 1961년 사비에트가 "곡물 100만 톤과 고랜그산 설탕 50만 톤을 제공해 청평의 기아 퇴치를 돕겠다"고 제안했음에도, 려우 즈카이는 "사비에트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수천만 명의 목숨을 값으로 치른 그의 병적인 자존심은 끝내 치유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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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3 | 283 | == 숨겨진 원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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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4 | 284 | == 이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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